샬롬, 우리 성은가족이 오늘 함께 묵상할 말씀과 간단해설, 읽을 말씀과 기도제목입니다.
1. 묵상 말씀: 렘5:20~31
간단해설: “우이독경”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소 귀에 경읽기”라는 뜻이 되는데요. 소 귀에 아무리 사람이 읽는 책을 백번 읽어주어도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뜻입니다. 소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까요.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오늘 유다백성이 모습이 마치 이와 같아 보입니다. 21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라고 했습니다. 그릇된 길을 계속 고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목적지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가는 길에 큰 함정이 있는데, “멈춤”이라는 표지판을 무시하고 계속 나아가면, 결국엔 함점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유다백성들이 꾸짖습니다. 크게 2가지 면에서,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죄에 대해, 다른 하나는 이웃을 속이고 제물을 취한 죄악을 꾸짖습니다.
22~25절까지 한 단락으로 묶을 수가 있는데요. (22절) ‘바다’라고 하는 것은 무생물입니다. 동물보다도 차원이 낮은 것이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각도 없고, 감정도, 의지도 없는 무생물이 하나님이 정해두신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한계를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한계를) 넘지 못하느니라” 말씀합니다. 무생물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정하신 규례와 율례대로, 행할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연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단순히 자연의 신비로움을 보며, “아름답다” “멋지다”고 감타정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만드신 자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위대함과 지혜의 풍성함을 깨닫고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백성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라고 했습니다. (23절)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며” 그러한 하나님을 경외하자! 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24절) ‘이른 비’는 파종할 때 필요한 비이고, ‘늦은 비’는 결실할 때 꼭 필요한 비입니다. 제때에 이러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좋은 열매를 거두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가나안 땅은 애굽의 땅과는 달리, 물을 머금고 있는 땅이 아닙니다. 한번 비가 내리면 쑥 빠져 나가는 사실, 척박한 땅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 될 수가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때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비옥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이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죄악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으로부터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것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오랬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재앙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너희가 어찌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떨며 나를 경외할 것이라” 선지자가 책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두려워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실, 세상 모든 일에 대하여 두려움과 염려를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주권을 인정하는 것인데,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또 주님의 뜻이 늘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문제는 우리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오늘 선지자가 두 번째로 책망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26~31절까지의 말씀인데요.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웃을 속이고 그들의 재물을 취하는 죄악을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26~27절) 유대인들을 “새 사냥꾼”으로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남을 속에 빼앗은 재물은 새 사냥꾼이 새를 잡아 “새장”에 넣은 것과 같다. 라고 말합니다.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너희가 속여 빼앗은 재물이 집에 가득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은 탐심으로 가득합니다. 탐심이 그들의 마음에 불같이 일어나서, 남을 속여 재물을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행위는 더욱 악하여져서, 불쌍한 자들의 재판을 공정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28절) 그 결과 그들은 번창하게 되었고 거부가 되었고, 살찌고 윤택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겉모습은 성공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부요해졌습니다만,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요. 패망의 구실이 되었습니다. 불쌍한 자들을 돌보며 그들을 보살펴 주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었습니다. 이 책임을 소홀히 한 것도 죄악인데, 하물며, 그들을 압제하고 탈취하여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어찌 선한 일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심히 부패한 일이라 꾸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29절)
30절 말씀에,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놀라운 일”이라고 하는 것은 긍정적인 놀람보다는 부정적인 것입니다. 이 놀람은 “심히 가증한” “더럽고 썩은” 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31절입니다. 진리를 말해야 하는 선지자들의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거짓 선지자의 지도대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항의하지 않습니다. 더나아가, 그것을 좋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와 백성들이 다 하나같이 어리석게 되고, 그들이 해야 할 위치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들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회와 나라가 어찌 되겠습니까? 결국은 패망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반드시 벌이 있겠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보복이 있을 것이라 꾸중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우리의 삶은 뗄레야 뗄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는 신앙을 가질 때, 탐심을 이기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성도는 이와같은 탐심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어떻게 탐심을 죽일 수 있습니까?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게 될 때, 탐심을 이기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힘만으로는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님을 참되게 경외하는 신앙을 가질 때, 비로서, 이웃 사랑도 가능할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참된 신앙을 통해서, 주의 계명인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읽을 말씀: 렘5:20~7:34
3. 기도 제목
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은 곧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다 백성들의 불의한 삶을 보면서,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참 경건의 믿음을 갖게 하시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드러내게 하옵소서.
3) 3,1절,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민족의 기독 지도자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도 맡은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책임 감당하는 충성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의 말씀 안에서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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