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죽임을 당하지 않은 죄에 은혜와 자비를 베풀거나 죄를 죽이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을 때 이런 속임이 진행됩니다. 이것은 마음이 죄에 대한 사랑에 크게 휩쓸려 있다는 표시입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은밀한 생각들을 갖고 있을 때는 나아만이 림몬의 신당에서 경배했을 때(왕하5:18)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겠습니다. 하오니 이 일에 대하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데, 이것은 참으로 서글픈 상태입니다. 정말이지, 사람이 어떤 죄에 빠져 있으면서 자비를 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 신앙과는 철저히 모순된 위선의 표시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유1:4) 죄악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사탄의 궤계와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도 수시로 이런 죄의 속임에 걸려들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그토록 단호하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라고 경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이런 논리를 빌어 육신의 생각이 크게 높아지고 자라는 것만큼 가증한 것은 없습니다. 육체는 은혜를 빌미로 방탕에 빠지고 자비에 대한 모든 말씀을 자신의 타락한 목적과 의도를 합리화시키는 데 사용함으로써, 죽이지 못한 죄에 자비를 적용시키는 것은 복음을 빌미로 육체의 소욕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도>
은혜를 빌미로 방탕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은혜를 통해 더욱 거룩에 이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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