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힘있게 걸어가는 것은 위대한 약속인 은혜 언약의 정수입니다. 평강과 능력이 있을 때 우리 영혼의 생명은 유지됩니다. 어쨌든 평강과 능력이 없으면 사는 것이 죽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수시로 평강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면, 우리의 삶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죽임을 당하지 않은 욕심은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이 두 가지 곧 평강과 능력을 박탈해 버립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다윗에게서 더 이상 분명한 증거가 없을 정도로 확실한 증거를 보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은 얼마나 자주 자신의 뼈가 부러지고, 영혼이 불안에 떨며, 상처가 심각하다고 탄식했습니까? 다른 실례도 찾아봅시다.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사57:17).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면 영혼에 무슨 평화가 있겠으며, 하나님이 그를 치시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호5:15). 이 말씀은 '내가 그들을 떠나 얼굴을 가리면 그들의 평강과 힘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뜻입니다. 따라서 과거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두려움이 우리의 두려움이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할 만한 힘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도할 때 슬프고 연약함 때문에 괴롭다면, 이 위험이 우리의 머리 위에 놓여 있는 상태라는 것을 유념합시다. 우리가 평안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내일, 우리는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수 없거나 최소한 즐거움과 생명력 또는 활력 속에서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한평생 편안한 시간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사는 날 동안 뼈가 부러져 고통과 공포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살을 쏠지도 모르고, 그러면 우리는 고뇌와 불안으로, 두려움과 당혹감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할 것입니다. 매순간 지옥과 진노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서글프게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깨닫고 놀라 겁을 먹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상처는 더욱 암울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우리의 영혼은 위로를 거절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오히려 질식당해 죽는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키지는 않겠지만, 이런 상태 속에 집어넣으시고 거기서 우리 자신의 파멸을 신속히 그리고 생생히 깨닫게 하실 것이라는 것, 이 점을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이 상태가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지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안에서 두려워할 때까지 이 생각을 멈추지 맙시다.
<기도>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평강과 능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늘 경건한 마음을 갖기에 힘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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